인생 전략쓰

강제성

​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강제성 뿐이다. 내 의지로 변화할 수 없다. 즉 환경만이 나를 바꿀 수 있다. ​ 횡으로 변하던 종으로 변하던 변하기 위해선 강제된 환경이 필요하다. 나와 다른 것들은 모두 나를 강제 시킨다. 나에게 있는 모든 고통은 또한 나를 강제시킨다. ​ 이미 몸에 갇혀있고 지구에 갇혀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강제성을 올바르게 활용하는 것이 가장 원초적인 흐름이다. 하나하나씩 진화하듯 그 강제성을 받아들이고 올라가는 것이 올바른 흐름이다. ​ 나쁜 강제성, 나쁜 환경을 그대로 흡수되어 먹혀버려 적폐가 되어버리면 잘못 활용한 것이다.

걱정은 구라

​ 마치 강아지가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 때문에 비상사태가 걸려 세상 무너질듯 긴장하듯, 우리의 걱정또한 더 높은 사람이 보았을 때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 있다. ​ ​ 걱정 그 자체에 빠져버리면 강아지가 되어버리는 것이고, 그 루트가 아닌 다른 루트를 바라볼 수 있으면 사람으로 살 수 있다. ​ ​ 어! 나 강아지였다. 그것만 깨달아도 그 순간, 사람의 시선이 보인다. 딱히 사람의 시선을 찾지 않아도, 강아지라는 것을 깨닫기만 하면 바로 보인다. ​

전략과 전술의 차이

전략은 무언가를 빼내는 것이고, 전술은 무언가를 더하는 것이다. ​ ​ ​ 전략의 략 자는 간략하고 간소화되고 예리한 것을 뜻하기 때문에 빼낸다고 볼 수 있다. 전술의 술 자는 재주와 기술을 뜻하기 때문에 뭔가를 연습해서 얻어내는 느낌이 강하다. ​ ​ ​ 칼이라는 것은 예리하게 만듦으로써 기능한다는 것을 알고 깎아내고 다듬어서 최초로 칼을 만들어낸 사람은 전략을 썼다고 볼 수 있고, 그 만들어진 칼을 양산하기 위해 잘 만들어내거나 잘 다루는 것은 전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냥 함

뭔가를 얻고싶어서 하는 것은 ‘함’이다. 나에게 없는 것을 채우고자 하는 것은 함이다. ​ ​ 근데 설거지꺼리가 있어서 설거지를 하는 것은 그냥 하는 것이다. 뉘앙스가 다르다. 그 뉘앙스를 표현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가끔 ‘그냥’ 이라는 단어를 붙인다. 그냥 했다. 당연히 했다. ​ ​ 그 그냥 하는 것은 뭔가 간절하게 원하는 것을 위해 행동을 하는게 아니라 좀 눈앞에 있으면서 단순하면서 별 생각이 들지 않는 것들을 의미한다. ​ ​ 문제가 눈앞에 보이기 때문에 어쩔수없이, 혹은 당연히, 하는 것.

목표를 세우고, 행동을 하면 이루어진다. 간단한 것일 때 매번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경험을 한다. ​ 하지만 목표가 크면 클수록 본질적으로 가상적이며 상상적이기 때문에, 행동을 하는게 어렵다. 현실에 없는 것을 구현하려고하는데 행동이 되지 않는 것도 당연해보인다. 간단한 것일 땐 에너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만, 큰 것일 때는 에너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안된다. ​ 목표와 행동을 이어주는 다리인 ‘감사’가 필요하다. 감사는 내 에너지나 랜덤적인 기분에 좌지우지되는 것을 넘어서 완벽한 ‘강제성’을 만들어낸다. 고맙기 때문에, 지금의 나의 상태를 긍정하기 때문에,

고통과 위험의 차이 ​ 고통은 실질적이며 현재 존재하는 것이지만 위험은 미래적이고 가상적인 것이다. ​ 고통에는 민감해야하지만, 위험은 받아들일 수 있어야한다. 고통은 적극적으로 줄일 방법을 찾아나가는 것이 필요하지만, 위험은 적극적으로 찾아나서야한다. 위험 속에 있는 고통은 절반은 구라고 절반은 고통이 있을 수 있다. 위험 속으로 가서 고통이 있으면 줄여나가면 되는 것이다. ​ 위험을 배제해버리면 얻는 것도 없다. 사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찾아야할 길은 위험 속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에 위험 속으로 들어갈 사고방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고통을 배제할 방법이 없어보인다.

일상성, 일관성은 사소해보이지만 사실은 영속적이며 무한한 개념을 의미한다. 그런 일상을 원한다는 것, 일관성을 원한다는것은 무언가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무작위적인 것, 엄청난 극단적인것, 이번만 넘기면 되는 어떤 것, 일시적인 것들을 보통 ‘원함’이라고 생각한다. 꿈이나 소망에서도 그것이 일시적이라면 원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을 원하지 않고 일상성을 원할 때, 즉 말장난 같지만 ‘원하지 않을 때’ == 일관성을 원할 때. ​ 가장 편안한 힘을 낼 수 있고 그로인해 가장 강한 힘을 얻을 수 있다.

창조는 안에서 일어난다.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자라나 태어나듯 창조는 반드시 안쪽에서 일어난다. 안쪽이란 무엇인가? ​ 그건 첫째로 나라는 캐릭터를 의미하면서 움직이지 않는 고정된 것을 의미한다. 바깥의 수많은 삼라만상에서 창조가 일어나는게 아니라 정해진 내 몸뚱아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 여러가지로 날라다니는 것이 창의성, 창조력이라고 착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가장 역설적으로 고정된 무언가가 가장 창의적이 된다. 얼마나 신비로운 역설인가? 새롭고 다채로운 것이 창의성으로 보이기 때문에 비로소 가장 고정된 무언가가 가장 새롭고 역설적이고 빛나는 것이 되어버린다.

두려움과 분노의 차이

​ 단지 생존이나 안전을 위해 하는 행동들은 모두 두려움에 기반한 것이다. 두려움 base의 행동이 아닌 분노 base의 행동이 필요하다. ​ <분노base> 내가 더 잘할 것 같은데? 이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아닌 것 같은데? 뭐하는거야 지금? ​ 웃긴건 두려움 베이스이던 분노 베이스이던 둘다 ‘필요함’이라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필요하니까 무조건 정당화되고 합리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절대 그래선 안된다. 두려움에 기반한 것들은 노예의 삶이다. 주인의 삶으로 살기 위해선 분노를 기반한 삶을 살아야한다. ​

강제성

Planted February 1, 2024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강제성 뿐이다.

내 의지로 변화할 수 없다.

즉 환경만이 나를 바꿀 수 있다.

횡으로 변하던 종으로 변하던 변하기 위해선 강제된 환경이 필요하다.

나와 다른 것들은 모두 나를 강제 시킨다.

나에게 있는 모든 고통은 또한 나를 강제시킨다.

이미 몸에 갇혀있고 지구에 갇혀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강제성을 올바르게 활용하는 것이 가장 원초적인 흐름이다.

하나하나씩 진화하듯 그 강제성을 받아들이고 올라가는 것이 올바른 흐름이다.

나쁜 강제성, 나쁜 환경을 그대로 흡수되어 먹혀버려 적폐가 되어버리면 잘못 활용한 것이다.

그 나쁜 강제성을 보고 나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나쁜 강제성에서 벗어나는 것을 절대적인 원칙으로 삼게되는 강제성을 획득하면 강제성을 제대로 활용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다른 방향으로는 강제성 속에서 올바른 것을 취하고, 나쁜 것을 버려내는 방법도 있다.

이 방법은 첫번째 방법을 적용할 수 없을 때 적용하면 그만이다.

일부러라도 그 강제성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

마치 탐험을 하듯, 그 강제성의 세상으로 들어갈 정도가 되어야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실패말고는 도저히 방법이 없다.

실패해야만 그 강제성에 도착한다.

실패인줄만 알았지만 결국, 가장 필요한 곳에 도달한다.

일단 저지르는 것은 성공하면 개이득, 실패하면 나를 변화시키고 강화시키는 강제성으로 들어가는 필승법이다.